2014년 8월 21일 목요일

프란치스코의 '정의와 평화'


지도력은 언어다. 프란치스코의 매력은 말에서 작렬한다. 교황의 말은 통찰의 도구다. 그것은 새로운 지혜를 생산한다.

 교황은 평화를 새롭게 규정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게 아니라 정의의 결과(the work of justice)다.”(8월 14일 청와대 영어연설)- 평화는 전쟁과 묶여진다. 양쪽은 대칭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익숙함을 깬다. 그 깨짐은 강렬하다. 그 대목은 성경을 원용했다.

 구약 이사야(Isaiah)는 이렇게 적었다.(32장17절) “정의로움의 성과가 평화이며, 정의로움(righteousness)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믿음이다.” 프란치스코의 말은 이어진다. “정의는 우리가 과거의 불의(不義)를 잊지는 않되 용서와 관용과 협력으로 불의를 극복하라고 요구한다.”

 한반도는 전쟁과 평화의 무대다. 북한의 6·25남침은 불의다. 교황의 말은 전략적 성찰이다. 한반도의 정의와 평화는 어떻게 구축되는가. 그것은 불의의 기억과 관용의 단련이다.


 교황의 말은 에이브러햄 링컨을 떠올린다. 링컨의 대통령 시절은 내전(남북전쟁) 때다. 나라는 쪼개졌다. 전사자는 남북 60만을 넘었다. 평화 여론은 거세졌다. 그것은 타협으로 참혹함을 끝내라는 질타였다. 링컨은 전쟁과 평화의 이분법을 거부했다. 그는 이사야 정의의 개념을 투사했다.

 협상 평화론은 쉬운 선택이다. 전쟁은 멈춘다. 하지만 국가 재통합은 허술하다. 노예 해방은 멀어진다. 링컨에게 그런 평화는 굴욕이다. 진정한 평화는 철저한 재통합, 완전한 노예 해방이다. 그것은 남부의 항전포기로 가능하다.

 링컨의 실행은 냉혹했다. 북부 장군들은 남부도시에 불을 질렀다. 남부는 항복한다. 전쟁은 끝났다. 그 순간 극적 변화가 전개된다. 링컨은 관용을 베푼다. 그는 남부 지도자를 용서했다. 장군들을 법정에 세우지 않았다. 그의 두 번째 대통령 취임사는 그 드라마를 압축한다. “정의롭고 영원한 평화(a just and lasting peace)”-. 미국은 재통합됐다.

 정의로운 평화의 성취는 힘들다. 그 과정은 피곤한 곡절이다. 링컨의 리더십 방식은 순서를 둔다. 치열한 승리, 그 후 대담한 관용이다. 거기엔 용기와 신념이 필요하다. 힘과 전략이 따라야 한다.

 교황은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언급한다. 메시지 시작은 “남북한 형제”다. 그 언어는 죄와 용서(마태오복음 18장21~22절)에 집중된다. “형제가 저지른 죄(commette colpe)는 일곱 번이 아니고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perdonargli)해야 한다.”(명당성당, 이탈리아어)- 용서의 정체는 무엇인가. 무조건 용서인가.

 차동엽 신부는 이렇게 설명한다. “가톨릭 신앙문법에서 용서를 말할 때 사과가 전제된다. 회개가 있고 용서가 있다. 북한이 용서를 구해오면 과감하게 받아들이라는 메시지로 들렸다.”

 북한의 체제 용어에 자기 죄는 없다. 북한은 천안함 폭침도 부인한다. 죄가 없으니 용서는 성립할 수 없다. 성당의 언어는 장엄하다. 그 말은 북한 쪽엔 각성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프란치스코의 말은 좌절한다.

 내전의 원한은 오래간다. 외국과의 전쟁보다 깊다. 그 적개심은 거칠다. 남북전쟁에 전범(戰犯)은 없다. 링컨은 내전의 악마적 요소를 의식했다. 20세기 뉘른베르크와 도쿄재판은 전쟁 범죄를 응징했다. 그 전쟁은 내전이 아니다.

 링컨의 드라마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 드라마는 롤 모델이다. 한반도에 맞게 재해석, 재구성해야 한다. 북한 엘리트 그룹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관대함의 메시지가 필요하다. 세련되게 전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중국으로 기운다.

 교황의 수사학(修辭學)은 쉽고 간결하다. 교황의 남북한 화해 출발은 단순하다. “북한 형제들도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거기에 희망이 있다.” 그 단순함의 가치는 우리 사회에서 잊혀졌다.

 미사의 끝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다. 그 합창은 소명감을 강화한다. 현실의 실천 프로그램은 취약하다. 남북한 운명의 주역은 한국인이다. 현실 속 주인의식은 미약하다. 화해의 결정적 장애물은 북한 핵무기다. 한국은 그 문제를 중국에 기댄다. 한·미 동맹에 의존한다. 주인 행세를 하지 않는다. 국민 전체가 핵 문제 해법에 매달려야 한다.

 주인의식은 소명감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일상 속에 북한이 들어와야 한다. 우리 삶 속의 북한은 달라진다. 북한 정권과 주민이 분리된다. 북한에 대한 시선은 전략적 다양성을 갖춘다. 기성세대는 수풍댐, 개마고원을 배웠다. 신세대가 북한의 산과 강을 알도록 해야 한다. 언어의 동질성은 화해의 동력이다. 자연의 연속성은 교류의 감수성이다. 그것은 한반도의 주인의식을 강화한다. 그 자세가 정의와 평화를 실천한다.

박보균 대기자
[박보균 칼럼] 프란치스코의 '정의와 평화'
중앙일보 2014-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