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5일 목요일

디테일에 강한 美 관피아 척결

-이해관계의 상충 방지제도 강화와 함께 윤리의식 준법문화 구축해야-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들은 매년 5월이면 학교에 제출하는 서류가 있다. 지난 1년간 교수로 활동하면서 ‘책무의 상충(conflict of commitment)’과 ‘이해관계의 상충(conflict of interest)’이 있었는지를 밝혀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다. 연구와 강의 및 교내 활동에 관한 보고와는 별도로 단과대학별로 제출하는 서류다.

몇 해 전 필자는 한국의 한 대학으로부터 겸임교수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라 싶어 학교에 문의를 했지만 ‘책무의 상충’이 있다는 답을 받고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스탠퍼드대의 경우 교수들의 학회 활동은 물론이고 1년에 53일까지는 외부 컨설팅도 할 수 있도록 교외활동을 허용하고 있으나 스탠퍼드대 교수 본연의 책임과 임무를 수행하는 데 지장을 준다면 이는 책무의 상충에 해당되는 것으로 매우 엄격하게 규제를 한다.

‘이해관계의 상충’ 역시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기업, 정부 등 외부기관의 자문이나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할 경우 대학의 품위를 손상하거나 이해관계가 상충되지 않도록 세밀한 규정을 갖고 있다. 즉, 외부 컨설팅 프로젝트에는 스탠퍼드대라는 이름이나 로고를 사용할 수 없으며 외부기관의 디렉터나 매니저 등 의사결정권이 있는 관리직은 맡을 수 없다.

요즘 한국에서 관피아 개혁이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고위 관료가 퇴임 후 자신이 봉직하던 부처의 산하 단체나 관련 기관의 장으로 가는 경우 이해관계가 상충될 소지가 많고 이를 눈감아 줄 경우 세월호 참사나 지난해 원전 사고에서 보듯이 엄청난 피해와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다. 따라서 관피아 척결은 국민들의 전적인 공감대를 얻고 있으며 다른 선진국에서도 이해관계의 상충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추세다.

미국에선 2009년 1월 21일을 기해 대통령령으로 고위 정무직도 커리어 관료와 마찬가지로 퇴임 후 로비 등을 할 수 없도록 관련 법안을 강화하였으며 영국에서도 전직 관료들이 주로 갔던 준정부조직(Quango) 192개를 최근에 폐쇄했다.

한국도 이번 기회에 관계(官界)뿐 아니라 법조계, 의료계, 학계 등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책무와 이해관계의 상충이 만연하고 있지는 않은지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학계의 경우 대학교수들은 기업 컨설팅뿐 아니라 정부 부처, 심지어 정치에도 깊숙이 관여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살려서 사회의 여러 부분에 기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장려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외부활동을 할 때 교수로서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문제가 되지는 않는지, 이해관계가 상충되지는 않는지 신중하게 검토해 봐야 한다. 특히 한국처럼 학연 지연 등의 인맥으로 얽혀 있는 경우 상충의 결과가 더 심각할 수 있으므로 적절한 규정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엄격한 규제를 해도 법적·제도적 장치로는 한계가 있다. 국민적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소위 ‘전관예우’를 봐도 1년간의 ‘냉각기’를 두는 등 관련 규정들이 있지만 여전히 관행처럼 만연하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따라서 정부가 현재 추진 중인 관피아 개혁에 있어서도 책무와 이해관계의 상충에 대한 규제 강화에 그쳐선 안 되며 어떻게 하면 올바른 윤리의식과 준법문화를 만들어 갈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특히 고위 공직자 등 사회지도층이 솔선수범하지 않고는 어떤 개혁도 국민적 신뢰나 공감대를 얻을 수 없다.

또한 관피아 개혁은 시대적 과제이지만 고위 관료들이 가진 전문지식과 경험을 사장(死藏)시키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 책무와 이해관계의 상충을 막을 수 있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강화하되 이들의 축적된 지식과 경험을 사회에 환원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미국의 경우도 고위 관료가 퇴임을 하면 일정 기간 관련 기관에 재취업할 수 없고 대정부 로비는 평생 동안 할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지만 일정 범위 안에선 퇴임 후에도 미국 사회를 위해 기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국은 지금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성장통을 앓고 있다. 하지만 아픈 곳을 임시방편으로 때우거나 무조건 잘라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좀 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제도적 개선과 함께 이를 뒷받침할 의식과 문화를 만들어가야 하며 이를 통해 더욱 합리적이고 투명한 사회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신기욱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소장
(동아일보 2014-06-03)